인간의 문화는 ‘비교’하는 데서 그 역사가 지속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순서의 대칭 비교에서 ‘먼저’의 대칭은 ‘나중’입니다. 즉 선후(先後)입니다. ‘시작’의 대칭은 ‘끝’입니다. 즉 시종(始終)입니다. ‘아름다움’의 대칭은 ‘추함’, 즉 미추(美醜)입니다. 찬반, 선악, 대소, 다소, 장단, 광협, 승패, 강약, 장졸, 빈부, 등락, 이런 것들 외에도 절약과 낭비, 근면과 태만, 명예와 수치, 사치와 검소, 교만과 겸손, 대범과 소심, 세상만사가 온통 대칭과 비교의 잣대를 수레바퀴로 하여 굴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1960년대의 우리 경제와 오늘날의 우리 경제 현황을 비교해 보면 참으로 큰 차이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대학 입시도 내신 성적 및 수학능력시험 성적, 그리고 면접이나 논술시험 성적 등 전부 성적을 비교하여 당락을 결정짓고 있습니다. 모든 시험이 다 수험자들을 비교라는 잣대로 측정하는 제도입니다. 비교는 이렇게 인생에 필수요소입니다. 개인생활은 물론 이요, 가족생활, 교회생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언론, 국방,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각종의 비교분석을 통하여 발전을 기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비교 없는 학문이나 체육, 예술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비교에는 크게 ‘수평 비교’와 ‘수직 비교’가 있습니다. 수평 비교에는 자기 자신의 비교, 즉 ‘절대 비교’와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상대 비교’가 있습니다.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 작년의 휴가와 금년의 휴가, 중학교 때의 학업성적과 고등학교 시절의 성적 등, 자기의 의식과 행동, 실적 등을 시간 차를 두고 전후에 걸쳐 자체 비교하는 것이 ‘절대 비교’라면, 다른 사람의 재물, 지위, 성적, 환경 등과 자기 자신의 것을 비교하는 것이 ‘상대 비교’입니다. 다른 사람의 환경이나 성적이나 성공으로 자극이 되어 성취동기가 유발된다든지 더욱 분발 노력하는 일은 좋은 비교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오히려 스트레스가 되고 원망이 되고 불평이 나오는 것은 나쁜 비교입니다. 아름답지 못한 비교에서는 남을 비방하거나 비판하는 행위도 나올 수 있습니다. 수많은 자녀가 부모님의 꾸지람 중,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여 나무라는 말에 엄청난 상처를 받고 비뚤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웃집 아내가 더 예쁘다, 이웃집 남편이 더 친절하다.’ 이런 말로 부부싸움이 유발되는 것도 다 좋지 못한 비교의식에서 터져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특수 비교’가 있으니 이것을 ‘수직 비교’라고 합니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찬송가 256장을 부르면서 주님을 우러러보며 현실을 주님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매사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면서 주님과 나의 처신을 두고 비교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우리 예수님은 어떻게 해결하셨을까?' '주님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떤 답변을 하셨을까?' 등은 참으로 아름답고 특별한 비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때에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떠올리면 나의 고난이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집이 작다고 불평이 나올 때, 주님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말씀이나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진리의 말씀을 현실과 비교하여 승화시켜 나간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비교입니까? 이것이 저 위로부터 아래로 수직선을 그어 비교하는 ‘수직 비교’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수평적인 ‘상대 비교’를 할 것이 아니라 수직적인 내 믿음 성장의 비교, 주님의 말씀으로 잣대를 대는 ‘수직 비교’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방과 판단에서 해방되어 자비와 긍휼을 베풀게 되고 주님께서 예비하신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거야말로 얼마나 좋지 못한 ‘수평 비교’에서 나온 상태입니까? 비교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은 아름다운 비교, ‘수직 비교’를 해야 합니다. 즉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이 아니라 사촌이 논을 사면 빌딩도 사도록 격려해 주고, 사돈이 승진하면, 내가 먼저 축하해 주는 이런 비교가 승리하는 비교요, 좋은 비교요, 아름다운 비교입니다. 바울은 ‘상대 비교’를 버리고 ‘수직 비교’를 하면서 이 세상의 자랑거리를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일장춘몽이요, 한갓 배설물 같은 부귀영화를 놓고 이 세상에서 비교 경쟁하고 다투며 삽니다. 지나고 보면 어린아이 시절에 구슬치기하며 몇 개를 더 얻으면 행복해 하고 몇 개를 잃으면 속상해 하던 철없는 수준처럼 허망하고 무가치한 것들입니다. 우리는 ‘수직 비교’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축복을 받는 길입니다. 주님이시라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셨을까? 우리 예수님이라면, 이 질문에 어떻게 답변하였을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기도해 보고 처리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비교요, 축복받는 비교입니다. 그 어떤 것이든 자신을 살피며 자체 비교, 타인과의 비교를 좋은 비교로 하되, 원망하지 않고 하늘의 상급을 바라며 감당해 낼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더해 주시며 고난을 이길 힘을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