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혁명이 발생할 당시의 프랑스는 잦은 반란과 폭동으로 혁명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왕족의 억압과 폭정에 시달려 시위를 하고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은 분명 그 사회에서 가장 헐벗고 고통받은 백성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장 부유한 지역에서 일어났으며 귀족 혈통에서 반란의 주동자가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상대적 박탈감 때문이었습니다. 박탈감은 ‘절대적 박탈감’(absolute deprivation)과 ‘상대적 박탈감’(relative deprivation)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왕의 폭정으로 굶고 진짜로 고통당하는 백성이 모여 있는 지역은 불만이 있어도 자신만의 고통이 아님을 알기에 어떻게든 참고 견디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귀족들은 권력에 붙어 아부하며 부정축재 하는 자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경험하면서 상대적인 빈곤과 박탈감을 느꼈던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평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윤택한 생활을 누렸을지라도 상대적 박탈감은 절대적 박탈감보다 더욱 큰 분노를 일으키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시인이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 감성적인 존재라고 말했는지도 모릅니다.


  감정적인 이유가 합리적인 이유보다 더 큰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런 인간의 감정 문제를 잘 이용한 것이 바로 ‘희생양 이론’입니다. 이것은 관심의 중심을 내부에서 외부로 이끌어 낸다는 이론입니다. 이것은 역사 이래로 많은 권력자가 사용한 방법으로서 공동체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대신 공동체 구성원의 관심을 외부로 돌려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입니다. 이 이론은 특별히 9․11테러 사건과 관련하여 미 정부가 유용하게 사용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클린턴에 이어 부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군수산업복합체’의 핵심을 이루는 극우 보수진영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낡은 무기를 청산하고 새로운 이권을 확보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9․11테러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부시 대통령은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 국민의 감정을 내부적인 문제가 아닌 외부적인 문제로 쏠리게 함으로써 국민 단합과 정권 강화를 동시에 꾀하였습니다. 그것은 곧 전쟁으로 드러났습니다. 부시 정부는 연이은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을 통해 대통령 지지자들이 모인 극우 보수진영의 의도를 충족시키면서 그동안 미국이 계획했던 일들을 신속하게 처리하는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건전하게 판단한 자기주장을 정직하게 펼 수 없는 상황이 주어지는 세상은 결국 대부분의 민중과 국민에게 고통으로 되돌아오기 쉽습니다. 역사 속의 수많은 권력자가 이런 방식으로 자기들의 정적을 제거하고 이권을 독점해 왔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불법적인 행동이 마치 자신을 희생하는 애국심인 양 변장해 왔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해방 후에 자신의 정적을 제거할 때 일제 강점기 당시 권력을 가진 자들을 ‘매국노’ 또는 ‘일본의 앞잡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사실인 경우도 있었지만 그들은 탐욕을 채우기 위해 자신의 적들에게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이름으로 누명을 씌웠습니다. 1950년 전후에는 ‘빨갱이’라는 단어가 그 자리를 대신하였습니다. 무조건 ‘빨갱이’, ‘반란군’이라는 딱지만 붙이면, 손쉽게 누명을 씌워 제거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이권과 감정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오직 하나의 이데올로기만 존재하였으며 이 외의 사상을 가진 자는 기회주의자로 여겨져 양쪽 진영에게 조롱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흑백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야말로 가장 무서운 사회입니다. ‘동지가 아니면 적’이라는 생각이 가득한 사회는 결코 건전한 판단과 성장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이라고 해서 무조건 ‘반대자’나 ‘적’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스스로 인간이기를 바란다면 ‘人’(인)이 의미하듯이 서로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서로 돕는 자로 연합해야 합니다. 비록 나와 같은 목표가 있지 않다 하더라도 상대방을 존중하고 이해하고자 할 때에 비로소 세상은 넓어지고 아름다워집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양한 모습으로 지으셨고 교회 안에 주어진 은사나 생래적 달란트도 다양하게 부여하셨습니다. 다양성을 인정하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단색의 먹구름에는 사람들의 눈길이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지개가 뜨면 모든 사람들이 탄성을 지릅니다. 무지개가 아름다운 것은 일곱 가지 색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가지 색깔만을 강요하는 좁은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내’가 인정받기 원한다면 ‘너’도 역시 인정할 줄 아는 풍토가 참으로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