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웃는 자가 진짜 웃는 자이다!(2020.07.19)

  우리는 최근에 하루 사이에 세상을 등진 두 인물 때문에 시끄러운 경험을 하였습니다. 한 분은 박모 전 서울 시장님 때문이었고, 또 한 분은 백모 예비역 사성장군때문이었습니다. 한 분은 민주투사라고 불리었고, 또 한 분은 전쟁영웅이라 불리었습니다. 한 분은 100세수를 장수하고 자연사하였다고 하고, 또 한 분은 60대 중반에 자살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죽음을 두고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당분간은 이분들에 대한 논란이 줄어지지는 않을 성싶습니다. 유명을 달리한 이분들에 대해 한편에서는 애도의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한편에서는 분을 터뜨리기도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디를 가나 그 이야기 주제들로 들썩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분들의 죽음에 대하여 큰 의미를 부여하진 않습니다. 그 이유는, 솔직히 말해 사람은 사람에 대해 정평정가할 수준이 못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목사의 눈으로 볼 때 그런 유형의 죽음은 지금도 매일 진행되고 있는 일상사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 일부러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 저로서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마저 드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이념에 따라 혹은 세계관에 따라 평가 기준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을 놓고도 한편에서는 친일파요, 자기 민족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다고 평가하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공산주의 공격에서 나라를 구한 전쟁영웅이라고 해석합니다. 한편에서는 민주투사요 민권 변호사 출신이라고 하고, 한편에서는 성인지 감수성이 약한 파렴치한이라고 하고도대체 누구 말이 옳은 것입니까?

 

  과연 그들은 성공한 사람이었습니까? 실패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렇다면 그 성공의 기준은 어디에다 두어야 합니까? 종국적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해답을 찾아야 할 자료는 성경입니다. 성경은 어떤 사람을 성공자로 취급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어떤 기준으로 성공자를 판가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의 기준으로 표현할 때, 한마디로 그것은 최후에 웃는 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인생은 마지막에 웃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진짜 웃는 자다!’는 격언도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인생을 오래 잘 살았어도 인생의 마무리를 잘 하지 않으면 마지막에 웃을 수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은 자신도 마지막에는 웃는 모습을 보이기 바라면서도, 그 방법론을 잘 모르고 사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녀들을 잘 키웠다든지 재산을 많이 모았다든지 하는 업적, 아니면 많은 사람에게 도덕적으로 흠이 없게 살았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기준이지 하나님의 기준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도 마지막에 웃는 자가 되어야 하는데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인생의 마지막에 웃는 자가 되겠습니까? 인생이 다 끝났다고 해서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실패했어도 우리의 숨이 다 끊어질 때까지 우리 인생은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웃으면서 세상을 하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따르던 선생이 십자가에 죽게 되자 한동안 우울하고 공포스러운 나날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2020절에 보면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드디어 웃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판단하기에 예수님은 분명히 죽어 사라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쫓아다니던 시절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사신다는 말씀을 안 하신 것이 아니었지만, 귀담아 두지 않았고 도리어 베드로는 그 말씀을 듣자마자 예수님의 입을 틀어막은 적도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3년 동안 죽도록 따라다녔는데 예수님이 죽으시면 우리는 무엇이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절대로 죽으실 수 없습니다.”(16:21)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간절한 바램을 뒤로 하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참으로 제자들에게는 애통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 되면 자신들은 덩달아서 출세하게 되고 앞날이 활짝 열리게 되는 줄로 믿었는데, 그들의 꿈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졸지에 예수님 때문에 자신의 목숨까지도 위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예수님은 놀랍게도 부활하셔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의심에 가득 찬 제자 도마에게 예수님의 몸을 직접 만져 보게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으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몸으로 부활하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으로 예수님은 정말 죽음의 권세에 벗어나 사망 권세를 이기신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제자들처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는 부활 신앙을 가진 자가 웃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떤 때는 나 자신을 무던히도 고쳐보려고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옛사람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실망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다 혹시 마지막에 하나님을 부인하고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한 마음을 가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 옛사람을 고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옛사람은 하나님께서도 고칠 수 없는 것입니다(6:63).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려고 하는 부분은 우선 우리의 옛사람이 아니라, 우리의 영인 것입니다. 우리의 영을 살리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사건을 믿을 때, 놀랍게도 우리가 그토록 살리고 싶어 했던 나의 영이 살아나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죽은 내가 살아 영원히 살게 되었다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고후 3:5~6).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만족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모든 일을 자신의 관점에서 보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보기에 좋으면 모든 것이 다 만족스러운 것으로 해석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만족하신 것으로 우리의 만족을 삼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족하신 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것으로 충분히 만족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은 모두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십자가는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졌고, ‘부활사건은 하나님 되신 성령님을 통하여 이루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적 기준으로 볼 때, 최후에 웃을 수 있는 자는 부활 신앙을 소유한 자라는 결론을 맺을 수밖에 없네요.

[개인정보취급방침] 주소 : 광주광역시 동구 경양로 247번길 22 (계림동) TEL : 062) 223-4872, 224-4872
Copyright ⓒ 혜성교회 All rights reseved. Provided By 교회사랑넷